일본 통치 시대의 교과서

日本統治時代の朝鮮の教科書(日本語版)

針原 崇志

(Harihara Takayuki)

일본 통치 시대의 조선에서는, 「황민화교육」이 행하여져, 일본어의 사용이 강제되어서 조선어의 사용이 금지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문화를 말살하고, 조선어나 조선의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금지되었다.
・・・그렇게 일반적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교과서에 그렇게 씌어져, 학교 교육으로 그렇게 배우고 있으므로,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확실히, 한국 병합에 의해 조선이 일본의 일부가 되었으므로, 일본어가 「국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지같이 천황을 존경하고, 황실을 존중하는 교육이 행하여지고 있었던 것도 틀림이 아닙니다.

그러나, 조선어의 수업도 행하여지고 있고
조선의 문화나 지리, 역사도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의 사진과 같이 , 1945년8월15일까지
조선어는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이해하기 위한 자료로서, 일본 통치 시대에
조선의 보통학교에서 사용되고 있었던 교과서를 소개하겠습니다.
(여기에 게재한 것은, 복각 판 〔あゆみ出版〕입니다)

보통 학교와는, 조선의 어린이들에
소학교 교육을 하기 위한 학교입니다.
즉, 이 교과서는 조선인의 어린이들을 위한 교과서입니다


1945년8월14일의 『매일 신보』
wikipedia「ハングル専用文と漢字ハングル混じり文」 
여기에서는, 단순한 증거자료로서 제시할뿐만 아니라
당시의 교과서를 통해서, 일본 통치 시대의 조선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여러가지 과목의 교과서를 게재했습니다.
「반일」도 「혐한」도 ,여기에서는 휴전하고, 릴랙스해서 즐겨 주십시오.

【한국어판은, 무료번역 툴을 사용해서 번역했습니다. 따라서 이상한 문장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의미가 통하지 않는 문장이 있으면, 가르쳐 주세요.
일본어로 씌어진 교과서는, 한국어로 번역중입니다. 】

※ 이 페이지에서는, 【위키페디아】에 게재되고 있는 사진이외에,
   「부산(釜山)에서 점심을」이라고 하는 홈페이지의 사진도 많이 사용했습니다.
  옛날의 사진의 이외에도, 귀중한 자료도 많이 게재되고 있으므로, 부디 보셔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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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민화교육

일본 통치 시대, 조선어가 아니고, 일본어가 「국어」이었습니다.
교과서는 기본적으로 국어인 일본어로 씌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황을 존경하고, 황실을 존중하는 교육이 행하여져, 교육 칙어도 배웠습니다.
일본인의 어린이들과 같은 교육이, 조선인의 어린이들에도 시행된 것입니다.
조선이 일본의 일부가 되고, 조선인이 「일본 국민」이 된 이상
어린이들을 훌륭한 일본 국민에게 키우기 위한 교육이 행하여진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普通学校 国語読本 巻一 普通学校 国語読本 巻一
 
普通学校 国語読本 巻三 普通学校 国語読本 巻一
 
 복숭아의 꽃 꽃.  
普通学校 国語読本 巻一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오.    김씨,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普通学校 国語読本 巻一
  
새벽
해돋이
아침
석양
 普通学校 書キ方手本 第二学年用 上 普通学校 書キ方手本 第一学年用
     
 즐거운 노래를 부른다
 먼 산은 흐리고 있다
들판은 개어 있다
普通学校 書キ方手本 第四学年用 上  普通学校 書キ方手本 第三学年用 上
  
 普通学校 修身書 巻一(児童用)
 
 
 普通学校 修身書 巻一(教師用)
  
 천황폐하가 천황에게 즉위된 최초의 시기,
당분간은 아오야마 이궁(靑山離宮)로부터 황거에, 다니고 계셨습니다.
그 때마다 도정의 전철이 몇대도 정차해 있는 것을 보시고, 사람들의 불편을 고려되어
「다른 길을 가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普通学校 修身書 巻二
  
제12 국경일
우리나라의 국경일은, 「신년」(新年), 「기원절」(紀元節), 「천황 생일·천황 생일 국경일」(天長節・天長節祝日)로,
이것을 「3대절」이라고 합니다.
「신년」은, 해의 최초를 축하하는 것입니다.
「기원절」은, 진무천황(神武天皇) (=초대천황)이 즉위의 예를 행하여진 날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천황 생일」(天長節)은, 천황의 태어나신 날에서, 그 축하를 하는 날이, 「천황 생일 국경일」(天長節祝日)입니다.
【※다이쇼(大正) 천황의 생일은 8월31일이었습니다만, 혹서로 제전에 적합하지 않는 시기이므로, 별도 10월31일이 천황 생일 국경일이 되고 있었습니다. 】

국경일에는, 궁중에서는 엄숙한 의식이 행하여집니다.
학교에서도 의식을 행합니다. 또 국민은, 집마다 국기를 게양해서 축하합니다.


제13 황후폐하
황후폐하는 작을 때부터 검소해서,또, 서민에게 자애의 마음을 쏟아 주셨습니다.
황태자비가 된 후도, 자신으로 누에를 길러지거나
전쟁의 때에는, 붕대를 만들어서 하사되었습니다.
황후가 되어서 이후도, 일층 교육이나 산업을 생각되어, 가난한 사람에게 배려되는등,
고마운 것이, 많이 있습니다.

普通学校 修身書 巻三
 
제20과 교육

우리들이 학교에 들어가고나서, 이미 6년이 됩니다.
입학했을 때는 아직 어리고, 사물의 도리도 몰랐습니다만,
지금은 일상 필요한 지식이나 기능도 습득하고,또 사람이 해야 할 길도 대충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해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교육을 받은 덕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교육을 받아서 처음으로 선량해서 유위한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회에 나가고, 농업·공업·상업기타 어떤 직업에 종사한다고 한들,
교육을 받지 않고 있으면, 좋은 성적을 올리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물며 직업에 대해서, 개량 진보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더욱 교육을 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들이 선량해서 우위이며, 잘 임무를 다하면, 우리들은 좋은 국민입니다.
국민 모두가 그러한 사람이라면, 나라는 번성합니다.

메이지(明治)39년(1906년), 조선에서 처음으로 보통학교가 설치되어서,
메이지(明治)44년에는, 교육에 관한 칙어가 하사되어서, 교육의 대방침이 결정되었습니다.
그 후, 다이쇼(大正)11년(1922년)에는 【새교육 령】이 발포되어,
계속해서 보통학교가 증설되어, 아동이 골고루 취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세계의 문명국은, 교육의 제도를 갖추고, 게다가 될수 있는 한 수업의 연한을 길게 하는 것에 힘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국의 문명의 진보도 산업의 발달도, 주로 그 국민의 교육의 정도 여하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따르고,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는 사람은, 교육이 중요하다라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됨과 동시에,
교육의 진보 보급에 힘쓰지 않으면 안됩니다.


제21과 교육에 관한 칙어

교육에 관한 칙어는, 메이지(明治)23년(1890년)10월30일, 메이지 천황(明治天皇)이,
신민이 준수해야 할 도덕의 대강을 나타내질 목적에서 하사된 것입니다.
칙어는, 3단에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제1단에는,

【※ [ ā ē ī ō ū] 은, 어미를 늘려서 발음합니다.  (예 : home page → hōmu pēji ) 】
Chin omouni waga kōso kōsō kunio hajimurukoto kōen-ni tokuo tatsurukoto shinkōnari.
Wagashinmin yoku chūni yoku kōni okuchō kokoro-o itsunishite yoyo sonobio naseruwa
kore waga kokutaino seikanishite kyōikuno engen mata jitsuni kokoni sonsu.


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일단에는, 우선, 황실의 선조가 우리나라를 건국되었을 때,
그 규모가 정말로 광대해서,동시에, 언제까지라도 움직이지 않도록 행해진 것,
선조는 또 자신을 수양되어, 신민을 사랑받아서,
만세에 계속되는 본보기를 남겨진 것을 말씀하시고,
다음에 신민은 자네에게 충의를 최선을 다하고, 부모에게 효행을 최선을 다하고,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맞춰서 충효의 미풍을 완수해 온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최후에, 이상이 우리국체(國體)의 가장 훌륭한 곳이며,
우리나라의 교육의 근본도 또, 여기 있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제22과 교육에 관한 칙어

칙어의 제2단에는,

Nanji shinmin
fuboni kōni keiteini yūni fūfu aiwashi hōyū aishinji
kyōken onoreojishi hakuai shūni oyoboshi
gakuo osame gyōo narai motte chinōo keihatsushi tokkio jōjushi
susunde kōekio hirome seimuo hiraki
tsuneni kokkeno omonji kokuhōni shitagai
ittan kankyū areba giyū kōni hōji motte tenjōmukyūno kōuno fuyoku subeshi.

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일단에는, 처음에 천황이 우리들신민에 대하여 친하게 호소하고 계셔,
우리들이 항상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 길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 취지에 의하면,
우리들신민은, 부모에게 효행을 다하고, 형제자매 사이 좋게 지내고, 부부 서로 사이가 좋게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친구와는 신의를 以て교제하고, 누구에 대하여도 예의를 지키고, 항상 자기 몸을 삼가해서 제멋대로 하게 하지 않고,
게다가 골고루 세상의 사람에게 자애를 미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학문을 습득하고, 업무를 배우고, 지식재능을 계발하고, 선량, 유위의 사람이 되고,
이 지식과 덕성을 활용하고, 공공의 이익을 증진하고, 세상에서 유익한 업무를 일으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항상 황실전범 ・ 일본 제국헌법을 중요시하고,기타의 법령을 지키고,
만약 나라에 사변이 일어나면, 용기를 내 일신을 바쳐서 너국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해서 천지와 함께 영원히 계속되는 황위의 성운을 돕는 것이, 우리들신민의 임무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상의 길을 잘 실행하는 사람은, 충량인 신민일 뿐이지 않고,
선조가 남긴 미풍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타이르고 계십니다.


제23과 교육에 관한 칙어

칙어의 제3단에는,

Konomichiwa jitsuni waga kōso kōsō no ikun-nishite
shison shinmin-no tomoni junshu subekitokoro
koreo kokon-ni tsūjite ayamarazu
koreo chūgaini hodokoshite motorazu.
Chin nanji shinminto tomoni kenkenfukuyō shite
mina sonotokuo itsunisenkoto-o koinegau.

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일단에는, 앞의 2단에 설명된 길은, 메이지(明治) 천황이 새롭게 결정된 것이 아니고,
실로 황실의 선조이 남겨진 교훈이며, 황실의 자손도 일반신민도 함께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 것,
또 이 길은, 옛날도 지금도 변함이 없고, 어디서나 행하여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천황은 자신도 우리들신민과 함께 이 유훈을 부적이 되어,
그것을 실행되어, 덕을 같이한다고 말씀하셔 있습니다.

이상은 메이지(明治) 천황이 하사된 교육에 관한 칙어의 개요입니다.
이 칙어에 나타내져 있는 길을, 우리들신민은 영원히 지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들은 성심을 다해서 일밤 이 칙어의 취지를 명심하고, 충량인 신민이 되어야 합니다.

 普通学校 修身書 巻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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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

이렇게 황민화교육이 행하여졌습니다만, 조선어의 수업도 필수과목으로서 행하여지고 있었습니다.
1938년이후는 필수 과목에서는 없어지고, 조선어의 수업을 실시할지 하지 않을지는 교장이 결정하게 되고,
1941(쇼와(昭和)16)년이후는 조선어의 수업은 행하여지지 않게 되었습니다만 <br>
첫머리의 사진과 같이 , 그 후도 일상생활에서는 보통으로 조선어가 이야기되어, 한글이 이용되어 있었습니다.

한국 병합시에는 취학률(서당도 포함한다)은 10%정도이었습니다만, 1937년에는 36%에까지 달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조선어의 수업을 실시하고, 한글의 보급에 힘쓰고 있었습니다.
조선 총독부가 조선어의 사용을 금한,등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거짓말입니다.
 
普通学校 朝鮮語読本 巻一  普通学校 朝鮮語読本 巻一
 
 普通学校 朝鮮語読本 巻一
 
습자라도, 한글의 서식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모필로 씌어진 한글, 특히 초서체는,일본에서는 좀처럼 보는 적이 없으므로, 흥미 깊습니다.
 
普通学校 書キ方手本 第二学年用 普通学校 書キ方手本 第一学年用
 
普通学校 書キ方手本 第四学年用  普通学校 書キ方手本 第三学年用
 
 학년이 오름에 따라서, 사용되는 한자도 많아집니다. 일본의 국어와 같습니다.
한자가 많이 사용되고 있으면, 한글을 읽을 수 없어도 개략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어서
조선어와 일본어가 문법적으로 가까운 언어인 것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普通学校 朝鮮語読本 巻一 
  
 
普通学校 朝鮮語読本 巻二
  
普通学校 朝鮮語読本 巻五
 
普通学校 朝鮮語読本 巻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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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문

일본의 초등학교에서는 한문의 수업은 행하여지고 있지 않았습니다만
조선의 보통학교에서는 제5학년으로부터 한문의 수업도 행하여지고 있었습니다.
조선에서는 전통적으로 한문이 공식문서로서 사용되고 있어
서당에서의 공부도 한문이 중심이었던 것을 고려한 것입니다.

조선의 역사적 문서나 석비의 대부분은 한문으로 씌어져 있으므로
한문을 읽을 수 있으면, 조선의 역사도 보다깊게 이해가 갑니다.

한편, 현재 한국의 학교에서는, 한자를 그다지 많이 배우지 않으므로,
대학생이라도 한자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적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자를 사용할 수 없으면, 한문은 물론
상에서 소개한 조선어의 교과서(어린이용)을 읽는것에도 고생하는 것이 아닙니까?

한국에서는 일본 통치 시대의 교육을 「우민화 교육」이라고 배우고 있습니다만
당시의 교육과 지금의 교육의 어느쪽이 「우민화 교육」일까요?
 
普通学校 漢文読本 第五学年用
 
명산

후지산(富士山)은, 혼슈(本州)의 중앙에 있는, 표고 1만2000자 (= 3776m)의 산에서,
부채를 눕힌 것 같은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산 정상에는 언제나 눈이 있습니다만, 여름에는 등산자가 많아, 산 정상에 서면,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습니다.
금강산(金剛山)은 훌륭한 경관으로 알려져 있고, 「1만2000봉우리」의 산들이 있다고 칭해지고 있습니다.
산 속에는 많은 낡은 절이 있어, 바뀐 형의 암석이나 폭포와 깊은속도 적지 않습니다.
가을에는 단풍이 훌륭하므로, 楓嶽(단풍나무의 산 )이라고도 칭해집니다.
普通学校 漢文読本 第六学年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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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화

조선어뿐만 아니라, 조선의 문화도 배우고 있었습니다.
「조선의 문화를 말살했다」라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다만, 「기도에서 병을 치료한다」등의 원시적인 문화나
「백정」 (천민)등의 비인도적인 문화는 부정했습니다.
그것들도 소중하게 남겨야 할 조선의 위대한 문화이었습니까?
  
김장

김장과는, 김치를 만드는 행사입니다.
가을에 수확한 야채를, 겨울의 도래에 갖추어서
보존하기 위해서, 입동의 전후에 실시됩니다.
연중 행사의 하나로서, 겨울의 풍물시가 되고 있습니다.
・・・이라고 하는 설명을
김장을 모르는 일본인을 위해서 했습니다만
한국어에서는 설명할 필요는 없네요.
이하, 일본인을 위한 설명을 한국어로 번역했습니다.
노력해서 조사했을 생각입니다만 틀리면 가르쳐 주십시오.
 김장의 풍경
「釜山でお昼を」
 
普通学校 朝鮮語読本 巻四
 
寒食(한식

한식란, 동지부터 105일째의 날에
불을 사용하지 않고 요리를 하고, 차가워진 식사를 한 풍습을 말합니다.

중국의 남북조시대, 【신(晋)】의 【문공(文公)】이 공적이 있었던 충신에게 포상을 하사할 생각이었습니다만
그 충신은 이것을 거절하고, 산에 숨었습니다.
거기에서, 충신을 찾아내기 위해서 산에 불을 붙였습니다만 그 충신은 산을 내리지 않고, 불에 타 죽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슬퍼하고, 불을 사용하지 않고 식사를 한 것이 한식의 발단이라고 하는 전설이 있습니다.

지금은 차가워진 식사를 하는 습관은 없고, 성묘를 행하는 습관만이 남아있습니다.
 
普通学校 朝鮮語読本 巻二
 
 한식일

2월말,혹은 3월의 처음에, 한식일 이라고 ,선조를 축제, 무덤參을 하는 날이 있습니다.
즉, 무덤의 주위에 나무를 심고, 풀을 뽑아서 청결하게 해, 무너진 곳을 꾸미거나 합니다.
설날,단오,추석 에 이날을 더해서 사대명절이라고 합니다.
한식과는, 불을 사용하지 않고 찬 물건을 먹는 것을 말합니다.
옛날, 중국에서 산에 숨은 충신을 찾아내자고 산을 태우면, 그 사람은 타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슬퍼하고, 한식했다고 하는 전설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옛날은 촌락에서 한식을 실행한 곳도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행하여지고 있지 않습니다.
떡, 불고기, 국수 종류등의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일을 쉬어서 하루 유락합니다.

普通学校 国語読本 巻八
 
秋夕(추석

추석도, 한식과 같이, 조선의 사명절의 하나입니다.
조선에서는, 음력의 8월15일(중추)전후에
선조제사나 무덤參등의 행사가 행하여집니다.
일본의 「백중 맞이」와 같은 것입니다.
사명절 안에서도, 추석은 가장 중요시되고 있습니다.
 
普通学校 朝鮮語読本 巻三
 
三姓穴(삼성혈)

조선의 신화도 교과서에서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내건 삼성혈은, 제주도 에 전해지는 신화입니다.
제주도 에는, 옛날, 탐라 이라고 하는 왕국이 있었습니다.
삼성혈은, 탐라 의 건국 신화입니다.
3명의 신이 나타났다고 전해지는 삼성혈멍은
지금도 제주도 의 관광 명소가 되고 있습니다.
삼성혈
wikipedia「삼성혈」
 
조선의 남방에 제주도(濟州島)라고 하는 큰 섬이 있습니다.
지금은 많이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만, 먼 옛날은 사람도 말도 소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 시기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이 섬에 큰 구멍이 3개 열고, 3명의 신이 그 구멍으로부터 한사람씩 나왔습니다.
신들은 높은 산에 오르고, 섬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느 쪽을 보아도 사람도 말도 소도 보이지 않습니다.
부근은 대단히 조용했습니다.
단지 기슭의 쪽 초목에 바다의 바람이 부딪치고, 곳 과 소리가 나고 있는 것 뿐이었습니다.
「이제부터 이 섬에 사람이나 말이나 소를 늘립시다 」
신들은 이렇게 말하고, 서로 수긍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인가, 신들에게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당분간,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채집해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의 것입니다.




普通学校 国語読本 巻五
 
날의 신과 월의 신

이 이야기는, 신라의 시대의 신화입니다.
신라 8대 왕 아달라 이사금의 시대
해변에 사는 「연오랑」과 「세오녀」가 바위에 타고 일본에 와서
일본의 왕국의 왕과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해변에서는 날과 월이 빛을 잃어버렸으므로
신라 왕이 두사람에 돌아오도록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연오랑은, 「천명으로 왕이 된 것이다」 라고 대답해서 돌아가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대신 세오녀이 만든 직물을 사자에게 주었습니다.
그 직물을 가져가곤, 하늘에 바쳐서 제사를 간 곳, 날도 월도 빛을 되찾았습니다.
・・・이라고 하는 신화가 그려지고 있습니다.

제사가 행하여졌다고 전해지는 장소를 「영일현(迎日縣)」 (현재는 경상북도 포항시)
바다를 「영일만(迎日灣)」이라고 합니다.
 
 
 
 
普通学校 国語読本 巻八
  
그네뛰기

어린이들의 놀러도, 조선의 문화가 그려지고 있습니다.
조선의 전통적인 그네나 시소는
우리들 일본인이 상상하는 그네나 시소보다도, 상당히 아크로바틱적입니다.

그네를 「구네」라고 하고, 그네를 노를 젓는 것을 「구네티기」라고 합니다.
「구네티기」는, 주로 단오의 시기에 여성이 즐기는 전통적인 놀이입니다.
얼마나 높고 탈 수 있을지를 겨뤘다고 합니다.
 
그네 그네. 흔들어라 흔들어라 그네. 산도 강도 움직인다.
그네 그네. 흔들어라 흔들어라 그네. 아직 날은 높다.
 普通学校 国語読本 巻一
 
널뛰기

「널뛰기」는, 정월의 여성의 놀이입니다.
그 기원에 관해서
양반의 여성은 좀처럼 집의 밖에 나올 수 없었기 때문
담의 밖의 경치를 보기 위해서 「널뛰기」를 갔다.
죄인의 남편을 가지는 아내가,
옥중의 남편 모습을 보기 위해서
죄인의 남편을 가지는 다른 여성과 교대에 뛰어 올라서
둘이서 담 안 남편 모습을 보기 위해서 시작했다.
・・・등, 여러 설이 있습니다.
 
널뛰기
「釜山でお昼を」
 
기잇콘코, 밧탄코.
노란 기모노가 올랐다. 빨간 기모노가 내려갔다.
기잇콘코, 밧탄코.
집도, 산도, 해님도, 올라간, 내려갔다.

普通学校 国語読本 巻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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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

보통 학교에서는, 조선의 역사도 배우고 있었습니다.
국사(역사)의 교과서뿐만 아니라
국어나 조선어, 한문, 창가(唱歌)의 교과서라도 조선의 위인이 많이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朴赫居世(박혁거세)

옛날, 한반도 남부에는, 「한」이라고 불리는 종족이 있었습니다.
「한」 은, 그 언어와 풍습에 의해 3의 종족에게 나눌 수 있어서
각각의 종족명과 그 있었던 지역을, 「마한」, 「진한」, 「변한」 이라고 칭합니다.
이것들을 총칭하고, 「삼한」이라고 합니다.

마한 에는 50여 나라, 진한 변한에는 각각 12의 나라가 있었습니다.
신라는 진한의 나라의 하나이었습니다만
잇달아 진한의 각국을 병합해서 강대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박혁거세 은, 신라 초대의 왕입니다.
왕은 농업을 진흥하고, 나라를 번영시켰습니다.
 
普通学校 国史(上巻)
 

박혁거세에게는, 다음과 같은 생탄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옛날, 진한의 6개의 마을의 사람들이
「훌륭한 인물을 군주로서 나라를 일으키자」라고 회의를 하고 있으면
요산의 기슭의 숲 안에, 하늘로부터 백마와 큰 알이 내렸습니다.
사람들이 다가가면, 백마가 알을 향해서 엎드려서 경례하고 있었습니다만
그 후 백마는 하늘에 돌아갔습니다.
사람들이 알을 깨뜨리면, 사내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사내아이를 목욕시키면, 그 몸은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내아이가 세상을 밝게 다스리는 것을 빌어
사내아이는 「혁거세」라고 이름을 붙여졌습니다.
사내아이는, 13세로 사람들에게 군주에게 추대되어
신라 최초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 전설이, 조선어의 교과서에서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普通学校 朝鮮語読本 巻三
 
昔脱解(석탈해)

석탈해은, 신라 제4대의 왕입니다. 석탈해에도, 생탄의 전설이 있습니다.

탈해의 아버지는, 다파나국(多婆那国)의 왕이었습니다만
탈해이 7년간, 어머니의 태내에 있고, 큰 알로 태어났으므로
아버지가 「불길하기 때문에 버려라」라고 명령했습니다.

어머니는 울면서, 예쁜 상자에 보물과 함께 알을 넣고, 바다에 흘려보냈습니다.
상자는 최초, 김관국(金官国)에 도착했습니다만,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상자는 또 흘러서, 다음에는 신라에 도착했습니다.
한사람의 노파가 이것을 발견하고, 상자를 열면, 안에 사내아이가 있었습니다.

노파는 매우 기쁨, 탈해과 이름을 붙이고, 소중하게 길렀습니다.
탈해은 점차로 커지고, 열심히 학문에 힘썼으므로 유명해졌습니다.
그리고 신라의 왕이 그를 불러내고, 탈해에 정치의 상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돌아가신후, 탈해이 62세로 뒤를 이어받고, 신라의 제4대 왕이 되었습니다.

그 전설이, 교과서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普通学校 国語読本 巻六
 
普通学校 補充唱歌集
 

新羅一統(신라통일)

신라 제30대 왕, 문무왕(文武王)은
백제, 고구려를 잇따라서 멸망시키고, 신라가 문무왕을 통일했습니다.

문무왕의 성은 「김」입니다.
신라에는, 【박혁거세】이 시조인 「박(朴)씨」, 【석탈해】이 시조인 「석(昔)씨」
그리고 【김(金)알지】이 시조인 「씨」의
3계통의 왕통이 있었습니다

알지의 6대 후의 자손, 미추이 돈씨 최초의 신라 왕(제13대)이 되어
제17대의 내물왕이후 、오랫동안 돈씨의 왕통가 뒤에 이어졌습니다 .
그 후, 제53대~제55대는 박씨, 제56대는 다시 돈씨이 되었습니다만
제56대의 경순왕이 신라 최후의 왕이 되었습니다.
 
普通学校 国史(上巻)
 
王建(왕건)

신라(新羅)의 말기, 민중의 반란이나 왕위쟁탈의 싸움이 많이 발생하고
신라의 국력은 약해졌습니다.
그리고 농민출신의 견훤이 후백제을 건국해
신라의 왕족이었던 궁예이 태봉을 건국해서
조선은 후삼국시대 이 되었습니다.

왕건(877∼943)은 아버지와 함께 궁예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궁예은 당초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그 인품은 지극히 포학해서, 인심은 점차로 궁예로부터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왕건은 궁예의 무장으로서 수많은 전공을 올렸습니다만
그 인품은 지극히 겸허해서, 점차로 인심을 모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궁예을 추방하고, 왕건을 왕으로서 맞이했습니다.

왕이 된 왕건은, 고려의 후계자를 자칭하고, 국호를 고려로 바꾸었습니다.
(고구려의 후기, 고구려는 정식명칭을 고려라고 칭하고 있었습니다)
왕건이 왕이 되고나서, 고려는 드디어 강대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편 신라는 점차로 쇠퇴해졌습니다.
결국 신라 왕은 고려에 항복하고, 935년, 신라는 멸망했습니다.
 
普通学校 国史(上巻)
 
大覚国師(대각국사)

대각국사(1055∼1101)은, 고려 제11대 국왕·문종의 시대의 사람입니다.
문종의 즉위로부터 약60년간, 고려는 최성기를 맞이했습니다.
당시, 불교는 신라의 시대이상에 점점 열심히 신앙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문종이 10명 남짓의 왕자를 모으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누군가 승려가 되고, 불교진흥을 위해서 다하는 사람은 없는가? 」
이것에 대하여, 당시 불과 11세이었던 후(煦)이
「나는 이전보다 출가하고 싶었습니다. 아버지의 목숨을 따르고, 승려가 됩시다」
이렇게 대답하고,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습니다.

그는 총명한 인물로, 학문도 크게 나아감, 불과 13세로 해서 고승이 되었습니다.
더욱 불교를 깊이 연구하기 위해서, 송에 유학하는 것을 희망했습니다만, 왕은 이것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왕이 돌아가신후, 재상의 간언도 듣지 않고, 제자두사람과 함께 송의 상선을 타서 송에 건넜습니다.
그리고 송의 황제에게 알현하고, 유명한 학자나 승려의 가르침을 배우고, 천태종과 유학을 조선에 알렸습니다.

귀국후, 그는 불교의 보급에 힘쓴뿐만 아니라 왕은 자주 국정의 상담을 했으므로
정치라도 엄청난 실적을 남겨 또 민중을 사랑하고, 세상 때문에 사람 때문에 힘썼으므로
왕에게서 민중까지, 누구나가 그를 존경했습니다.
47세로 돌아가셨을 때, 왕은 극진하게 장례식을 행하고
「대각국사」의 시호을 주었습니다.
 
普通学校 国史(上巻)
 
朝鮮의太祖(조선의 태조 )

고려의 후기, 중국에서는 명이 나라를 일으키고, 원의 세력은 약해졌습니다.
당시, 고려는 원에 조공하고 있었습니다만, 명이 탄생했으므로
원에 조공할 것인가, 명에 조공할 것인가, 둘의 파벌이 발생했습니다.

당초는 원을 지지하는 세력이 우세가 되고, 왕은 명을 공격하기 위해서
이성계(1335∼1408)등을 장군으로서 거병했습니다.

그러나 명에 조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성계는, 압록강에서 병사를 반전해서
수도·개성시에 들어가고, 반대파의 수령을 잡고, 다음에 왕을 폐지해서 새왕을 옹립했습니다.

그 후, 이성계의 명성은 점점 높아져, 고려의 신하 안에도
이성계를 왕으로서 추대하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점차로 많아졌습니다
유학자이며, 이성계의 친구이었던 정몽주는 이것을 우려해
이성계를 배제하려고 생각했습니다만, 반대로 이성계의 일파에 암살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비견하는 사람이 없어진 이성계는
1392년, 고려왕을 폐지하고, 이씨 조선의 최초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 후 100년간, 나라는 평온하게 안정되고, 민중도 편안하게 생활해
학문도 열심히 해지는등, 조선 시대의 가장 왕성한 시대라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한글이 창제된 것도 이 시기입니다.
 
普通学校 国史(上巻)
 
成三問(성삼문)

성삼문 (1418∼1456)은 조선 왕조의 정치가・학자입니다.
제4대 왕·세종은, 민중에게도 이해가 가는 문자가 필요라고 생각해
성삼문등 8명의 학자에게 연구를 명했습니다.
왕의 명령을 받은 성삼문은, 랴오둥(遼東)의 학자를 13회도 방문해서
음운을 배우고, 한글 창제에 공헌했습니다.
일본 통치 시대, 한글은 「언문」이라고 칭해졌습니다.
普通学校 補充唱歌集
 
李退渓(이퇴계)과 李栗谷(이율곡)

이씨 조선의 시대가 되고, 그것까지 융성했던 불교는 점차로 쇠퇴해져
대신 유교가 왕성하고, 수많은 유학자가 나타났습니다.
중이라도 【이퇴계】과 【이율곡】을, 조선 주자학의 2대유라고 칭합니다.
현재, 두사람은, 한국의 지폐 초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퇴계(1501∼1570)은, 본명을 이황이라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배움을 좋아하고, 백부에게 논어를 배웠습니다.
34세로 문과의 시험에 합격하고,
여러가지 관직을 경과했습니다만
48세로 병을 이유로 관직을 사임해서 귀향하고,
제자의 육성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그 후 다시 왕의 목숨을 받아서 성균관의 대사성,
홍문관 (궁중의 경전에 관한 사항을 담당하는 곳)및
예문관 (궁중의 문장에 관한 사항을 담당하는 곳)의
대제학장관등을 역임했습니다.
사후, 사람들은 그 죽음을 아끼고,
도산서원을 건립했습니다.


이퇴계
wikipedia「李退渓」
 
이율곡 (1536∼1584)은, 본명을 이이이라고 칭합니다.
어머니보다 학문을 배웠습니다만
7∼8세로 시문을 만들 만큼의 수재로
23세로 이퇴계에 알현했을 때
퇴계는 그 총명함에 놀랐다고 합니다.
29세로 문과의 시험에 합격하고, 여러가지 관직을 경과해서
후년에는 이조판서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는
사림파와 훈구파의 정치투쟁이 격렬해져
사림파 내부에서도, 이퇴계의 계통을 이어받는 동인과
이율곡의 계통을 이어받는 서인과에 나뉘여
당파대립이 발생했습니다.
주자학의 해석의 차이가, 정쟁의 원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율곡 자신은 당쟁의 중재에 힘썼습니다만
율곡가 돌아가신후, 당쟁은 일층 격렬해졌습니다.

게다가, 동인, 서인은
노론,소론,남인,북인,등의 당파에 분열되고,
그것들의 당쟁 때문에, 조선의 정치는 혼란했습니다.


이율곡
wikipedia「李栗谷」
 
普通学校 国史(下巻)
 
普通学校 朝鮮語読本 巻六
 
韓石峯(한석봉

한석봉 (1543∼1605)은, 이씨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서도가입니다.
과거에 합격해서 문관이 되고, 나라의 주요문서나 비석등에게 많은 필적을 남겼습니다.
이퇴계이 모셔지는 도산서원의 편액(건물, 문이 높은 곳에 내걸리는 액)은
당시의 왕·선조의 명령으로, 한석봉이 집필한 물건입니다.

한석봉의 실적으로서 가장 유명한 것은, 「천자문」입니다.
천자문은, 중국의 남북조시대, 양의 무제의 명령으로
주흥사(周興嗣) (470∼521)이 만든 한문의 장시입니다.
4글자 250구, 총계 1000이나 되는 한자가 중복할 일 없고 사용된 문장으로
중국 국내는 물론, 일본이나 조선에도 전해져, 한자를 배우는 교과서로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조선에서는, 한석봉이 제14대 국왕 (선조)의 명령을 받아서
1583년에 보고 썼다 천자문이 가장 널리 보급되어서
서당에서도 자제교육을 위해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普通学校 朝鮮語読本 巻五
 
英祖과正祖(영조과 정조)

영조(1694~1776)는, 제21대 왕(재위 1724~1776).
정조(1752~1800)는, 제22대 왕(재위 1776~1800).
두사람의 왕의 치세는 76년에 달했습니다.

그동안, 농업을 진흥하고, 검소검약을 장려해서 사치를 훈계해
가혹한 형벌을 그만 두고, 학문을 장려하는등, 민정에 힘썼습니다.
또, 「이퇴계와 이율곡」으로 설명한 당쟁의 조정에도 노력했으므로
이 시대에 당쟁은 적어지고, 그 폐해도 적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후의 왕은 모두 어리게 해서 즉위했으므로
정권이 외척으로 옮겨가고, 왕의 권위는 점차로 약해져 갔습니다.
 
普通学校 国史(下巻)
 
보통 학교  국사교수 참고서 (조선 사역(事歴)교재)

국사의 교과서는, 어디까지나 일본의 역사를 중심으로 기술되고 있어서
그 안에 조선의 역사를 추가해서 씌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조선의 역사를 가르치는데도 불충분하다고 할 이유로
조선에 관한 사항을 자세하게 해설한 교사용의 국사교수 참고서가 만들어졌습니다.
조선의 어린이들에, 조선의 역사를 가르치기 위한 참고서입니다.
그 권말에는, 조선의 역대 각왕조의 국왕도 게재되고 있었습니다.
「조선의 역사를 가르치는 것을 금했다」라고 씌어져 있는 현재의 교과서의 기술이
완전히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이, 이 것부터도 분명히 압니다.
 
普通学校 国史教授参考書(朝鮮事歴教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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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지리

지리의 수업에서는, 조선용의 보충 교과서를 사용해서
조선의 지리를 배웠습니다.
조선의 영웅, 위인과 같이 조선의 지리에 관해서도
국어, 조선어, 한문, 창가의 교과서라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普通学校 地理補充教材
普通学校 朝鮮語読本 巻四
 
 白頭山(백두산)

백두산은, 중국 지린성과 북한 량강도과의 국경에 있다
한반도의 최고봉 (2, 744m)입니다.

그 산 정상에는, 중첩되는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졌다
용왕담혹은 천지이라고 불린다
칼데라 호수가 있습니다.
백두산은 조선 민족 발상의 땅으로서 신성시 되고 있습니다.
 
 
백두산 산 정상의 칼데라 호수
wikipedia「白頭山」
 
普通学校 朝鮮語読本 巻三
 
 
普通学校 補充唱歌集
 
金剛山(금강산)

금강산은, 백두산과 병칭되는 조선의 명산입니다.
「금강산(金剛山)」은 하나의 산이 아니고
최고봉 비로봉 (1, 638m)을 필두에
【1만2000봉우리】이라고 칭하는 봉우리들을 총칭해
금강산 이라고 칭합니다.
「다이아몬드(금강석)의 와 같이 빛나는 산」
로서 「금강산」이라고 명명되었습니다.
 
wikipedia「金剛山」
 
 普通学校 補充唱歌集
 
京城(경성=현・서울)

서울은, 이씨 조선 시대는 「한성」
일본 통치 시대는 「경성」이라고 칭했습니다.
경성에는 조선 총독부가 두어져
조선에 있어서의 정치의 중심이 된 것 이외에
회사나 은행도 많아, 경제에 있어서의 중심이며
조선 군 사령부가 두어져, 군사의 중심이었습니다.

1924년에는, 일본에서 6번째의 제국대학
경성제국대학도 설립되었습니다.
경성제국대학에는, 「조선어문학과」라고 하는 학과도
설치되고 있었습니다.
일본 통치 시대의 남대문
「釜山でお昼を」
 
 普通学校 朝鮮語読本 巻三
 
普通学校 補充唱歌集 
 
 경성을 흐르는 한강은, 겨울에는 동결해서
스케이트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스케이트의 역사는 의외로 낡네요.
 
한강에서 스케이트를 즐기는 사람들 (좌측위)
「釜山でお昼を」
 
 19 스케이트

나는 어제, 아버지와 스케이트를 보러 갔습니다.
강은 꼬박 얼음이 얼어서, 마치 두터운 유리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 많은 사람이 미끄러지고 있습니다.
남자도, 여자도, 어른도, 어린이도, 미끄러지고 있습니다.
앞에, 뒤에, 오른쪽에, 왼쪽에, 자유자재로 미끄러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이서 손을 맞잡고, 발을 맞춰서 미끄러지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중에는, 아직 익숙해지지 않고 있는 것 같아서, 때때로 넘어져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보고 있어서, 스케이트의 연습이 하고 싶어서 참을 수 없어졌습니다.
「아버지, 나에게도 시켜 주십시오. 」
고 부탁하면
「이번의 일요일에 데리고 와서 가르칩시다 .」
고 말씀하셨습니다.


普通学校 国語読本 巻五
 
平壌(평양)

평양에는 옛날 고구려의 수도가 두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래, 조선 북부에 있어서의 중요한 거점에서
일본 통치 시대에도, 조선 제2의 대도시이었습니다.

일본 통치 시대
온난해서 농업에 적합한 반도남부에서는 농업을 진흥해
광물·동력 자원이 풍족했던 반도북부에서는 공업을 진흥한다
「남농북공」라고 하는 분업 체제가 있었습니다.
평양도, 부근에서 양질인 석탄이 채취되었으므로
공업이 활발히 행하여졌습니다.

반도북부는, 도시에서도 농촌에서도
당시의 분이 평화스러워서 살기 쉬웠던 것 같네요.
 
평양 중심부 (1945년이전 )
wikipedia「平壌」
 
普通学校 朝鮮語読本 巻六
 
평양의 교외에 「모란봉」라고 하는 조금 높은 언덕이 있습니다.
청일 전쟁의 때, 여기에 청국의 요새
「모란대」가 설치되어, 청일양군의 격전지가 되었습니다.
「모란봉」라고 하는 이름은,
불고기의 조미료등을 만들고 있는 회사의 이름으로서
일본에서는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 통치 시대의 모란봉
「釜山でお昼を」
 
普通学校 補充唱歌集
 
 新義州(신의주)

옛날, 평안북도의 중심은 의주이었습니다만
경의선 (경성과 의주를 잇는 철도)이 개통했을 때
신의주역이 설치되었습니다.
그 후, 교통의 요충인 신의주역을 중심으로 도시가 발전해
1921년 평안북도의 도청이 신의주에 옮겨졌습니다.
 
일본 통치 시대의 신의주 역사
wikipedia「新義州青年駅」 
 
普通学校 朝鮮語読本 巻四
 
신의주)의 북쪽에서 서쪽에 걸쳐서
중국과 조선의 국경의 강, 압록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일본 통치 시대, 일본에서 가장 긴 강은 압록강이었습니다.
신의주를 흐르는 압록강
「釜山でお昼を」
 
普通学校 補充唱歌集
 
  1911년압록강 교량이 완성되어
신의주(新義州)는 국경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교량은, 압록강을 통항하는 배의 방해가 안되도록
교량의 일부가 개폐하는 선회 다리이었습니다.
가동중의 압록강 교량
wikipedia「鴨緑江断橋」
 
普通学校 国語読本 巻七
 
釜山港(부산항)

부산(釜山)은, 때로는 대일방위의 요충으로서
때로는 대일교역의 거점으로서
옛부터 일본과의 관계가 밀접한 도시입니다.
특히 1876년의 부산항 개항이래, 급속히 발전을 이룩해
부산은 평양과 거의 같은 인구를 가진다
조선 제3의 대도시가 되었습니다. (1921년 현재)

여담입니다만,제가 최초에 노래할 수 있게 된 외국어의 노래는
초등학생의 때에 의미도 모르고 기억한
조용필의「돌아와요 부산항에」입니다・・・
  
 
普通学校 朝鮮語読本 巻四
 
 普通学校 補充唱歌集
 
부산(釜山)~시모노세키(下關)간에 운항된 부관연락선 은
조선과 내지을 연결하는 교통의 대동맥이었습니다.
당시는, 「도쿄출발 런던행」과 같이
일본에서 부관연락선 ~시베리아 철도를 경유해서
유럽까지 갈 수 있는 장대한 표가
일본 각지의 주요역에서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부관연락선「경복환」
「釜山でお昼を」
 
 普通学校 国語読本 巻七
 
위의 교과서에는, 연락선으로 배 여행을 즐기는 정경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아래로는, 오타와 목포를 연결하는 철도 「호남선」의 여행을 즐기는 정경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도, 가끔은 여행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지요.
 
普通学校 朝鮮語読本 巻五
 
백제(百濟)의 고도 【부여(扶余)】

호남선 연선에 있는 지방도시, 부여에는
옛날 백제의 수도가 있었습니다.

부소산성, 정림사지등, 당시의 모습을 남기는 구적을 비롯해
백제 시대의 유물을 소장하는 국립 부여 박물관
역사 테마파크 「백제 역사재현 단지」등이
관광지로서 유명합니다.
부소산성
wikipedia「扶余」
 
普通学校 補充唱歌集
 
신라(新羅) 의 고도 【경주(慶州)】

신라의 수도는, 경상북도의 경주에 두어졌습니다.
삼한 통일을 다한 문무왕의 시대부터
약110년간, 신라는 최성기를 맞이합니다. <br>
그 시기 불교도 학문도 크게 발전해
불교의 발전에 따르고, 불교미술도 진보했습니다.
당시의 유구이 많이 남는 경주는
「지붕이 없는 박물관」 이라고 칭해지고 있습니다.

아래의 교과서에 그려지고 있는 것은
동양에서 가장 낡은 천문대와 여겨지고 있다
경주 첨성대입니다.
 
경주 첨성대
 wikipedia「慶州瞻星台」
 
 
 
 普通学校 朝鮮語読本 巻五
 
신라 시대에 건립된 불국사(佛國寺)와
신라 시대의 불교유적인 석굴암(石窟庵)은
1995년, 세계유산에 등록되었습니다.
또 2000년에는, 경주 역사유적지구가
세계유산에 등록되었습니다.
석굴암
「釜山でお昼を」 
 
普通学校 国語読本 巻八
 
고려(高麗) 의 고도 【개성(開城)】

현재, 남북의 경제협력사업
개성공업단지에서 알려져 있는 개성에는 고려의 시대
수도가 두어졌습니다.
개성과 경성과의 거리는 철도로 불과 70km 정도이므로
일본 통치 시대는, 철도를 사용해서
경성에 통근·통학하는 사람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왕건왕릉
wikipedia「開城」 
 
普通学校 補充唱歌集
 
普通学校 朝鮮語読本 巻六
 
이조시대가 되고, 수도는 한성로 옮겨갔습니다만
그 후도 개성은 상업의 도시로서 발전을 이룩하고, 그 역군은 개성 상인이라고 불렸습니다.
개성상인은 전국에 상업활동을 전개한 것 이외에
오늘의 복식 부기에 가까운 「개성 부기」을 고안한 것이라도 알려져 있습니다.
 
普通学校 国語読本 巻八
 
또 개성은, 인삼의 명산지로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은 일반적으로 【고려 인삼】이라고 칭해지고 있습니다만
본래는 인삼에서도 특히 개성에서 생산된 인삼만을 【고려 인삼】이라고 칭해서
특히 진중되고 있었습니다.
 
普通学校 朝鮮語読本 巻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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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

수신과는, 도덕 교육입니다. 수신(修身)이라고 하는 호칭은,
사서오경의 하나, 「대학」의 한 구절
自天子以至庶人 壹是皆以脩身爲本
(위는 천자에게서 아래는 서민까지, 자기의 행동을 바로잡는 것이 기본입니다,라고 하는 의미 )
에 유래합니다

구미에서도 종교교육을 통해서의 인격육성이 중시되고 있게
고금동서 , 인격육성이 모든 교육의 기본입니다.
아무리 지력이나 체력을 높여도, 마음의 육성을 소홀히하면
도리어 그것들을 악용하게 되어버립니다.
따라서, 수신은 국어와 동등혹은 그 이상 중시되고 있었습니다.
 
 학교에 들어간 시기는, 아직 글자도 읽을 수 없으므로
교과서에는 그림만이 실려 있고, 선생님이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제1학년의 후반부터 설명 문장도 씌어져 있습니다만
제1학년의 교과서는, 조선어와 일본어가 병기되고 있습니다.
 
普通学校 修身書 巻一(児童用)
 
普通学校 修身書 巻一(教師用)
 
普通学校 修身書 巻一
 
학년이 오르면, 위인을 소개해서 교육이 행하여질 것도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니노미야 긴지로(二宮金次郎), 나이팅게일등
일본의 국내외를 막론하고, 수많은 위인이 채용되어 있었습니다.
이퇴계, 이율곡등 조선인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수신의 교과서는, 위인전의 다이제스트 판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普通学校 修身書 巻三(児童用)
 
 普通学校 修身書 巻四
 
普通学校 修身書 巻四
 
普通学校 修身書 巻五
 
일본 통치 시대, 조선 총독부는 병원건설이나 상하수도정비등
하드면에서의 위생환경의 정비에 힘썼습니다만
그와 동시에 , 수신등의 수업으로 위생교육을 해
소프트면에서의 위생의식의 향상에도 힘썼습니다.
 
6 몸을 튼튼하게 해라
이 어린이는 학교에서, 몸이 튼튼하지 않으면 훌륭한 인물이 될 수는 없다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음식물·마실 것에 주의하고, 아침 빨리 일어나기로 했습니다.
또, 심호흡이 몸에 좋다고 배웠으므로, 그것을 시작했습니다.

7 청결
【順姫】는 매일 아침 일어나서 곧 세수합니다.
그로부터 집의 내외를 청소하고, 나중에 수족을 정성스럽게 씻습니다.
어머니가 세탁할 때는, 자주 돕습니다.

普通学校 修身書 巻二
 
普通学校 朝鮮語読本 巻四
 
학년이 오르면, 배우는 내용도 고수준이 됩니다.
여기에 소개하는 「공민의 임무」의 기술에, 「선거」라고 하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납세액에 의한 제한은 있었습니다만, 조선에서도 지방선거가 실시되어
조선인이 입후보하고, 투표할 수 있었습니다.

또, 1945년 4월, 조선, 대만에서도 중의원의원선거가 실시되게 법률이 개정되었습니다.
실제로 선거가 행하여지기 앞에 종전에 의해 일본 통치가 종료했으므로
조선에서 중의원의원선거가 실시된 적은 없었습니다만,
만약 실시되고 있으면, 조선 선출의 조선인 의원이, 일본의 의회에서 활약하고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 이전부터 내지에 사는 조선인에게는 선거권·피선거권이 주어져
도쿄 4구 선출의 조선인의 박춘금(朴春琴)이 중의원의원으로서
조선인의 권리확대를 요구해서 국회에서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이하 인용이 길어집니다만, 선거의 마음가짐에 관해서 교사용의 수신서에 씌어진 문장을 소개합니다.


여러분은, 길평의회나 부·면협의회의 의원의 선거가 행하여지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길평의회나 부·면협의회는 지방공동의 이익을 발달시켜, 민중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서,
교육이나 권업이나 토목이나 위생등의 일을 하는 것에 붙고,
여러가지 상담을 하기 위해서 설치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장래, 공민으로서 이 회의에 참가하는 평의회원이나 협의회원이 되거나,
혹은 선거하거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평의회원이나 협의회원은 공공의 일의 상담에 관여하는 중요한 직업이므로,
그 사람의 적부는 지방의 행복하게 대단히 관계가 있기 때문에
성격이나 행동이 선량하며 의견이 옳은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금전물품기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그 본심을 굽혀서 선거하는 것 같은 사람은,
법률상 처벌해지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강요당해서 소신을 나부끼게 하거나,혹은 함부로 투표를 포기하는 것 같은 것도
향리를 사랑하는 기분이 없다고 해야 합니다.

또 의원에게 뽑힌 사람은, 그 직책이 중대한 것을 생각하고, 열심히 공동의 복리향상에 힘쓰고,
부·면의 주민의 신뢰를 허무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또 사리 때문에 공직의 지위를 이용하거나,혹은 헛되이 부락의 감정에 사로잡히고,
혹은 당파적 정신에 지배되어서, 분규를 일으키거나 하는 것 같은 것은, 모두 향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공민으로서, 자신의 부·면의 사항은, 즉 자신의 사항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이것을 다스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일본인=통치자」 「조선인=피통치자」라면, 조선인에 대하여 이러한 교육을 할 필요등 없습니다.
조선인도 일본인과 동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교육도 행하여지고 있었습니다.
 
 고향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의 정입니다.
사람은 아무도, 자신의 집을 그리워함과 동시에,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우리들이 언제나 보고 있었던 산이나 강은, 어디에 가더라도 잊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오랫동안고향을 떠나고 있으면, 반드시 돌아가고 싶어집니다.
우리들의 향리에는, 학교를 세우고, 도로를 만들고, 다리를 가설하고, 제방을 쌓고, 수도를 정비하는등 하고,
해마다 개발이 진행되어, 공공의 이익행복은 점차로 증진하고, 점점 좋은 곳으로 결정됩니다.
그렇지만 개선 해야 한 곳은 아직 많이 있습니다.

길· 부(府)에는, 교육·권업·토목·위생등의 일에 대해서 여러 상담을 하기 위해서,
길에는 길평의회, 부(府)·면에는 부(府)·면의 협의회가 있습니다.
이 회의에 참가하는 평의회원·협의회원은, 공공의 일의 상담을 받는 중요한 역할이기 때문에,
충실하게 공평하게 공공의 이익행복의 증진에 힘쓰지 않으면 안됩니다.
또 평의회원·협의회원을 선거하는 사람은, 공평한 생각을 以て, 선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길·부(府)·면으로 공공의 이익행복의 증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듭니다.
이 비용은 그 토지의 사람들이 분담하는 것이 당연해서, 지방세를 납세하는 것은 그 때문에입니다.
따라서, 조세는 기한에 늦는 것이 없도록 자진해서 납세 해야할 것입니다.

부(府)·면의 주민은 납세의 의무를 행하는 것은 물론, 자진해서 부(府)·면의 일을 자신의 일이라고 인식하고,
교육이나 산업을 왕성하게 해, 풍속의 향상등, 공동 일치해서 공공을 위해서 힘쓰고, 이웃의 향리와도 공동하고,
우리지방의 이익행복의 증진을 도모하고, 우리향리를 훌륭한 좋은 곳으로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普通学校 修身書 巻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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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생활

「학교에서는 열심히 공부합시다」라고 가르치는 것은 당연합니다만
그것과 함께 「쉬는 시간에는 건강하게 놉시다」라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사에 대하여도
쉬는 시간에는, 아동에게 노는 것을 장려하세요.
될 수 있는한 교사도 아동과 함께 놀이, 아동을 감독을 하세요.
아동의 기호에 응해서 노는 방법을 여러가지로 바꾸세요.
운동이 과격해지는 적이 없도록 주의하세요.
나쁜 놀이를 시키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 이렇게, 쉬는 시간에 있어서의 교사의 마음가짐이 상세하게 지시되고 있었습니다.
(「普通学校 修身書 巻一(教師用)」参照)
 
 
普通学校 修身書 巻一
 
당시의 학교에서도, 운동회, 소풍등의 학교행사가 행하여지고 있었습니다.
「식민지지배」라고 하는 처참한 이미지와는 멀리 떨어졌다
훈훈한 학교생활의 풍경이 눈에 선합니다.
 
 1 운동회
지금, 일학년생의 경주를 하고 있습니다.
「준비」「1,2,3」자, 뛰기 시작했다. 빠른, 빠르다.
「적조,이겨라 」「백조,이겨라 」
1등, 2등, 3등, 기쁠 것이다 /
普通学校 国語読本 巻二
 
普通学校 朝鮮語読本 巻三
 
普通学校 補充唱歌集
 
   
普通学校 補充唱歌集
 
길.
다리.
마을.
 
 소풍.
산.
강.
 普通学校 国語読本 巻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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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어땠습니까?
상상보다 쭉 온당한 내용이라고 느껴진 것이 아닙니까?

일본 통치 시대, 미국의 군인 【맛코이】소장(少將)이 조선을 방문해서, 다음과 같이 감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조선은 지리적으로 만주의 연장이므로
만주같이 도적이 횡행, 산업도 발전하고 있지 않고, 붉은 흙 색의 벌거숭이산 아래에서
민중은 게으름 피운 생활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열차가 압록강의 철교를 넘으면, 차창으로부터 보이는 풍경은, 우리들의 예상과 크게 달라
산은 나무들이 무성하고, 농민은 수전에서 열심히 경작에 종사해
평양(平壤)등의 공업지대에서는, 굴뚝으로부터 연기가 활발하게 나오고 있어서
역앞으로 보이는 민중은 모두 시원시원한 의복을 입어서
치안은 잘 유지되어서, 아무런 불안도 없고, 군중은 지극히 질서 잘 행동하고, 게다가 그 얼굴에 근심은 보여지지 않으므로
만주에 비교해서 실로 격세의 느낌이 들었습니다.

(鎌田沢一郎『朝鮮新話』p330. 번역 때문에, 의역했습니다. )


당시의 교과서를 읽어서 상상한 풍경은
이 감상과 같은, 평화로운 조선의 풍경일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본인과 일부의 조선인만이 유복했던 것이다」
그러한 반론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확실히, 그 대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에서도 같은 것입니다.
당시는 일본도 아직 풍요로운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농촌부에서는, 어린 어린이를 봉공에 보내거나 몸팔이를 하고 입을 줄이다 , 그러한 일도 행하여지고 있었던 시대입니다.

조선도 또, 일본과 다름없이 유복해서, 일본과 다름없이 가난했습니다.
왜라면, 조선도 당시는 일본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에서 착취하고, 조선을 희생으로서, 일본을 유복하게 한 것이 아니고
조선도 일본의 일부로서, 산업을 진흥하고, 민중의 생활 향상에 힘쓰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조선의 독자성을 존중하고, 조선어의 수업을 해서 한글의 보급에 힘써
조선의 문화나 역사도 어린이들에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일본에 의한 조선 통치의 실태입니다.



2013년5월, 한국에서 슬픈 사건이 있었습니다.
95세의 노인이 「일본의 통치는 좋았다」라고 발언한 것을 듣고, 37세의 남자가 미친 듯이 노해서
노인을 차고, 가지고 있었던 지팡이를 빼앗고, 노인을 지팡이로 때려서 죽여버린 것입니다.
경로정신을 존중하는 한국에서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버린 것은,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95세라고 하는 것은, 어렸을 때, 여기에서 소개한 교과서에서 배우고 계신 년대의 분입니다.
그 어린이가, 일본 통치 시대에 청춘시대를 보내고, 제2차 세계대전이나 조선 전쟁을 체험해
군사독재 시대를 경과하고, 지금까지 살아 온 것입니다.
그 노인이 「일본의 통치는 좋았다」라고 발언된 것입니다.

한편 37세라고 하는 것은, 군사독재 시대마저도 거의 체험하지 않고
한국이 풍부해져, 서울 올림픽이 행하여졌을 때라도, 아직 12세의 어린이입니다.

역사를 살아서 체험된 노인을, 교과서에서 역사를 배운 젊은이가
「네의 역사 인식은 틀린다! 일본 통치 시대는 어두워서 비참한 시대다! 」
이라고 미친 듯이 노하고, 죽여버린 것입니다.

이 사건이 무엇을 의미할 것인가,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피해를 받아진 노인에게 애도의 뜻을 나타냅니다.



한국에는 그러한 어리석은 인간이 있고, 그 어리석은 행동을 찬양하는 어리석은 대중이 있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만
그것이라도, 한국인의 대다수는, 본래는 온후해서 상냥한 것이라고, 나는 믿고 싶습니다.
예를 들면, 살해된 노인도 한국인입니다.
또 내가 이전 만난 한국의 노인도, 매우 건강한, 밝게 온후한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한국에서 반일감정이 만연하고 있는 것은
그 근본에, 한국 정부에 의한 거짓말투성이의 반일역사교육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 거짓말을 뒤집어 엎고, 진실한 역사를 이해하는 것으로, 반일감정도 누그러지는 것이 아닐까?
낙관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희망하면서, 이 페이지를 작성하고, 한국어에도 번역했습니다.
한국의 여러분이 진실을 이해하고, 반일감정을 포기하는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한편, 한국에서 반일감정이 높아지는 것에 따르고, 일본에서도 혐한(嫌韓)감정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측의 부당한 주장에 반론하고, 어리석은 반일행위에 항의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일제가 조선어를 금하고, 조선의 문화를 말살했다」라고 주장한다면
이와 같이 증거를 제시하면서 「그것은 틀림이에요」라고 반론해야 하며
한국에 영합하고,혹은 반발을 두려워해서
교과서에 거짓말을 쓰고, 어린이들에 거짓말을 가르치는등, 더없이 어리석습니다.
그러한 우둔한 매국놈에게, 일본의 미래를 짊어지는 어린이들을 위한 교과서를 쓰는 자격은 없습니다.
부당한 주장, 부당한 행위에는, 의연한 태도로 대처해야 합니다.

한편, 우리들 일본인으로서 잊어서 안되는 것은
당시 일본 국민으로서의 교육을 받고, 일본 국민으로서 자란 수많은 조선인이
전장에서,혹은 후방에서, 일본을 지키기 위해서 싸워 주었다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도, 21, 181명의 조선인이 모셔지고 있습니다.
중에는 특공대원으로서 일본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 준 분도 있었습니다.
그들 조선인은, 일본의 호국의 영웅입니다.
부당한 주장에 반론하고, 부당한 행위에 항의하면서도
조선인에의 감사의 기분만은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이라고 하는 것이 나의 기분입니다.



역사를 되돌아봐 보면, 안중근(安重根)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도
상대의 나라를 업신여기거나, 미워하거나 하고는 있지 않았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은 조선인 때문에」라고 하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후년, 국제연맹사무차장을 맡은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이, 그 저서에
한국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과 면회했을 때의 모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번의 조선 방문의 목적은, 식민 연구의 재료를 얻는 것이라고 전했다.
이것을 들은 이토 히로부미은
「조선에 내지인을 옮긴다고 하는 논의가 많은 것 같지만, 나는 이것에 반대하고 있다. 」 과 돌연 발언되었다.
그러나 조선인만으로 이 나라를 발전시켜집니까? 」이라고 물으면
「너, 조선인은 훌륭해요.
이 나라의 역사를 보아도,
일본에 비교해서 훨씬 진보하고 있었던 시대도 있다.
이 민족이 이 정도의 나라를
스스로 경영하는 것이 할 수 없는 이유는 없다.
재능에 있어서는 결코 뒤져서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가 이러해져버린 원인은,
인민이 나쁜 것이 아니고, 정치가 나빴던 것이다.
국이 안정되면, 인민은 양이라도 질이라도 부족은 없다. 」
조금 강한 말씨로, 그렇게 이야기되었다.
(新渡戸稲造『偉人群像』p309~p310.  번역 때문에, 의역했습니다.)
 
 조선의 민족의상을 입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
wikipedia「伊藤博文」

그렇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에 의한 조선 지배의 상징과 간주되어서
일본에 의한 조선 지배에 반대하는 안중근에게 암살되어버렸습니다.

이것에 충격을 받은 태황제(고종)은, 이토의 죽음을 아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토를 잃은 것으로, 동양의 인걸이 없어졌다.
이토는 우리나라 에 충실, 정의의 자세로 임해
뼈를 백두산에 메워 , 한국의 문명발달에 다할 생각이다고 공언하고 있었다.
일본에 많은 정치가가 있지만, 이토처럼 세계를 대국적으로 잡고, 동양의 평화를 늘 생각한 사람은 없다.
실로 이토는 우리나라의 자부다.
(名越二荒之助『日韓共鳴二千年史』p237)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역사에 경의를 표하고, 조선인의 자질을 높게 평가해서
장래는 조선인 자신이 조선을 통치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식민지화에 반대하면서
정치개혁을 하고, 학교나 병원의 건설등 민생의 향상에 힘쓰는등
조선의 발전에 인생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그 이토 히로부미를 잃은 것으로, 흐름은 병합의 방향으로 기울고, 1910년, 한국 병합에 이르렀습니다.

이 사건을 잡고, 지금의 일본에서는 안중근을 「무지해서 어리석은 테러리스트」라고 생각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정보사회의 현대라도 일한간에 수많은 오해가 발생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정보가 모자랐던 당시 그러한 오해가 발생한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당시의 일본에서는, 「조국을 위해서 몸을 바친 영웅적 행위」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이 많이
또 그 인품에 감명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안중근에게 경의를 내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달필이었던 안중근은, 수많은 휘호(모필로 문자나 그림을 쓰는 것)을 남기고 있습니다.

안중근의 인품이 나타나 있는, 이러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어느 날 【園木末喜】 (= 옥중에서 안중근의 통역을 담당한 인물)은
구마모토(熊本)의 어머니가 병이라고 하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안중근에게는 그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만,
두사람만의 때, 안중근은 【園木】에 이렇게 말을 걸었습니다.

「【園木】씨, 최근 표정이 어두운 것 같습니다만, 무엇인가 걱정거리가 있습니까? 」
【園木】은 사형이 확정한 안중근을 걱정시키지 않도록,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 조금 감기로 몸상태가 좋지 않은 것 만큼입니다. 」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좋습니다만,그것뿐만 아니는 것 같은 생각이 든 것입니다.
혹시 서울의 부인인가 구마모토의 어머니에게 무엇인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

그 시기 이미 두사람 사이에는 우정이 싹트고 있어서,
【園木】도 4세 연상의 안중근에 대하여 실제의 형과 같은 감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園木】은 오빠(형님)에게 고백하는 것 같은 기분으로 구마모토(熊本)의 어머니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열매를 말하면 구마모토(熊本)의 어머니가 몸져 누워 있는 것입니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에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쭉 고생을 해서 여자 손 하나로 나를 길러 주었기 때문에,
몸져 누웠다고 연락을 받아서 걱정이어서, 아마 그것이 표정에 나온 것이지요」

안중근은 그것을 듣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
「우리들은 이미 4개월도 함께 행동하고 있을 테니까, 【園木】씨에게 무엇인가 있었던 것은 느껴요.
빨리 봄이 되어서 따뜻해져서 어머니가 무사회복되면 좋네요」

자신이 사형판결을 받아서 언제 목숨이 없어질지도 모르는 입장인데도
자기 일이나 가족을 마음을 써 주는 안중근의 진심과 우정에 【園木】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안중근은 계속해서
「【園木】씨,이것을 받아 주세요 」
과 1장의 서를 내밀었습니다.

그것은 이전부터 옥중에서 붓을 들고 있었던 서이었습니다.
「贈園木先生 日韓友誼善作紹介 庚戌二月 大韓国人 安重根」
과 씌어져 있습니다 .
「일한 친선을 위해서는, 서로를 잘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
그러한 의미이네요 ?」
「그 대로입니다 . 【園木】씨, 나는 집행전의 기도시에 【園木】씨의 어머니의 건강도 기도해요.」
이런 사형수도 있는 것인가 .
【園木】은 말을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http://ameblo.jp/yurikim1965/entry-11418531747.html보다 전재. 번역 때문에, 의역했습니다.)

「한일우의」라고 쓰 지 않고, 【園木】을 위해서 「일한 우의」라고 쓴 바에도
상대를 배려하는 다정함을 느껴집니다.

사형 집행 당일 , 간수인에도 불구하고 안중근을 선생으로서 숭경하고 있었던 【千葉十七】에

為國献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 )

과 씌어진 휘호를 선물했습니다.
사형 감사의 말을 남겼습니다.

「친절하게 해 주시고, 고마웠습니다. 
동양에 평화가 초래되어, 한일의 우호가 되살아났을 때, 다시 태어나서 또 만납시다. 」

(名越二荒之助『日韓共鳴二千年史』p248 번역 때문에, 의역했습니다)

확고한 애국의 신념을 가지고, 태연자약으로서
그러면서도 경건한 크리스트 교도 답다 마음 상냥함을 겸비하고, 일본인에게서도 경애되는,
안중근은, 그러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안중근도 또, 일한 우호를 기원하고 있었습니다.
안중근도 이토 히로부미 도 , 똑같이 일한 우호,동양평화를 기원하고 있었습니다.
안중근 혹은 이토 히로부미 을 영웅·위인으로서 숭경한다면,
일한우호를 희구한 그 마음도 또 계승해 야 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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